거듭나야 요3:1-15
상당한 학식을 가진 니고데모가 공식적인 율법학교를 다니지도 아니한 나사렛 출신 목수 예수에게 밤중에 찾아왔다고 하는 것은 이 니고데모가 예수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밤중에 찾아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신은 정상적인 율법학교를 나오고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남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자신이 나사렛 예수를 찾아 갔다고 하는 소문이 날 경우 자신에게 불이익을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행하는 이 표적 즉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 사건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당신이 이런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니고데모의 관심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니고데모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교회에 나올 때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기적만을 쫒듯이 교회에 와서 궁극적인 구원에 대하여는 소홀이 하고 예수를 믿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속적인 인기나 인간관계나 사업의 성공 등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 질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님으로서 내게 주어지는 부산물. 혹은 전리품에 관심을 가질 경우가 많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저 예수믿음으로서 자녀들이 잘되고 성공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믿는 것이 과연 그게 전부이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값싼 은혜입니다. 우리는 값싼 은혜를 이제 그 만 구하고 보다 귀한 은혜,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1)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
니고데모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 백성을 정복한 자” 혹은 “백성의 승리자” 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은 3개 파당이 지어져 있었는데 바리새인, 사두개파, 그리고 에세네 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엄한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 율법학자들이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바리새인 가운데 바리새인 이라고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종교적인 사법기관에 속하는 70인 공의회가 있었는데 바로 니고데모는 여기에 속해 있는 상당한 지위에 있는 관료였던 것이다. 뿐 만 아니라, 니고데모는 후에 예수님의 장사지낼 때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무덤을 내 놓자 요한복음19:39에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리트라 쯤 가지고 오기도 하였을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무엇인 부족해서 젊은 청년 나사렛 예수를 찾아 왔겠습니까? 그것은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유대교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영생에 관한 문제입니다.
종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일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그리고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죽은 다음에 내세는 있는가? 입니다. 오랫동안 유대교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씨름 했지만 자신 안에 내재 해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속 시원히 말해주는 종교가 없었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 해주는 랍비나 선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이 그를 밤중에 예수를 찾아오게 한 것입니다.
그는 공회원으로서 저명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밤중에 예수께 찾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3:2에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적어도 나사렛 예수가 범상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공회원이었기 때문에 나이도 예수보다 훨씬 연장자였을 것이고 목수신분이었던 예수보다 종교적으로 훨씬 지적인 우위에 있었음에도 그가 젊은 예수를 찾아온 것은 단 하나, 그는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랍비에게서 볼 수 없었던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부른 것은 그는 예수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종교적인 선생으로 자신의 종교적인 궁극적인 질문에 대하여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종교적인 궁금증을 풀어줄 위대한 선생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교인들 가운데는 예수를 위대한 종교적인 스승, 인도의 구루나 유대교의 랍비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그저 좋은 말씀정도 듣는 것으로 생각하고 교회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여하고 종교적인 생활, 즉 기도나 묵상을 한다 해도 영혼의 만족이나 기쁨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 까요? 영적인 만족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종교적인 행위나 생활이 그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종교적인 생활로는 영적인 충만함과 영적인 기쁨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은 이유 일 것입니다.
2)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의 표적을 보고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3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여기서 ‘거듭난다, 란 말의 뜻은 헬라어로 ’아노덴.(anothen)인데 이 말의 뜻은 다시 난다, 위로부터 난다, 근본적으로 라는 말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위로부터 새롭게 난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우리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을 1차 출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육적인 출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관계가 형성됩니다. 부모의 피와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영적인 출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거듭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이것을 ‘거듭남’ (New born)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게는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 이야기만 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찬양을 부를 때 마음에 감동이 솟아납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예배 속에 감사가 있고, 감동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듭났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자 니고데모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것을 봅니다. 4절에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이 우문 속에서 우리는 아무리 학식이 많고 지식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영적으로 깨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 할 수 없음을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사도행전 9장에 바울이 다마스커스에 예수쟁이 들이 모여서 예배드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잡아들이고자 대제사장 공문을 가지고 가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빛이 저를 비추어 땅에 엎드러져 있자, 소리가 들리기를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 하느냐... 주여, 누구시오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사건이 있은 후에 사울은 눈이 어두워서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마스커스에 아나니아라고 하는 주님의 제자가 사울이 있는 직가에 가서 사울에게 안수 할 때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즉시 보게 되었고 사울이 일어나 세례를 받고 그가 주의 종이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눈에 있던 비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울이 진리를 보지 못하게 했던 어둠인 것입니다. 어둠이 그로 하여금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나니아의 안수에 의해서 성령의 강한 빛에 의하여 그동안 그를 사로잡아 주님을 보지 못하게 했던 어둠이 물러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어둠이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이 지루합니다. 졸립니다. 따분합니다. 말씀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지식인이었고 유대인의 관원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을 해서 마음을 명징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좌선을 해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인간의 수단이나 방법이나 수양이나 선행으로 인간이 새로워 질 수 없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예수를 만날 수 없고 성령을 체험 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새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새 사람이 되며 하나님께로부터 난자 가 되는 것이다.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예수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시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중요한 말씀은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인간이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선행이나 공로나 좌선이나 참선이나 도를 닦아서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물로 거듭나야 합니다. 물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세례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례 중요한 의식이기는 하지만, 어렸을 때 받는 유아세례라든지, 집단으로 받는 세례라든지, 그리고 아무런 준비 없이 받은 세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그러기에 여기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약1:18절에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벧전1:23절에도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영이 살아나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4-42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열 한사도가 함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 높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가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인데 너희가 대제사장과 결탁하여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너희가 못 박아 죽였다. 그런데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심으로 살리셨다고 증거 하자, 거기에 있던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어찌할 꼬 하거늘 38절에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말씀 속에서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고 변화되어 하루에 3000명이 세례를 받았고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오직 기도하기에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심령이 변화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즉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처럼 옥토와 같은 심령에 말씀의 씨앗이 떨어질 때 거듭남의 신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딛3:5 에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요한복음 16:8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런데 이렇게 중생의 체험을 한 사람에게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마음의 변화가 있습니다. 마음이 변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중생할 때 하나님의 성품이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딛3:5 에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첫째,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본성이 부패해졌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말을 빌리면 전적으로 타락하여 부패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타락한 본성이 회복되려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것을 선행은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부패한 본성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진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을 악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막7, 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12,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하지만 중생의 은혜가 임하면 부패하고 타락한 마음이 변화를 가져 옵니다.
둘째는, 중생한 사람은 생활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마음이 변화면 자연스럽게 생활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중생하기 이전에는 삶의 중심이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생하고 난 이후에는 예수님 중심으로 바꾸어집니다. 성경중심입니다. 그리고 교회중심으로 바꾸어집니다. 중생이전에는 술집이나 드나들고 좋지 않은 곳이나 가고 싸움이나 하던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릅니다. 늘 원망하고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이 감사의 사람이 됩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게 됩니다.
셋째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다. 요한1서3,5-8절에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자신을 위해서 살던 사람들이 삶의 목표와 가치가 하나님을 향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고 봉사합니다. 새로운 욕구가 생깁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위해서 살아갔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말씀을 사모합니다. 성경을 읽고 가까이 합니다. 기도하고 싶습니다. 교회를 가까이 합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의 백성들을 가까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이 믿어집니다. 예배가 기다려 지고 즐겁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집니다. 영적인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가득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보다 주의 전에 있는 것이 즐겁습니다.
1904년 영국의 웨일즈 지방에서 강력한 성령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광부출신이었던 이반 로버츠(1878∼1951)라는 무명의 청년에 의해 일어났는데 이반 로버츠는 넉넉지 못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12살부터 아버지를 따라 광부의 일을 했으며 대장장이의 일로 하였다. 그러던 중 1904년 그의 나이 26세에 신학을 하게 된다. 이반은 빈한한 생활 속에서도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다’는 강한 영적 욕망을 가지고 자라났다. 마침내 이반 로버츠에 의해서 웨일즈 도처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성령에 사로잡힌 로버츠는 모리아 교회 담임목사 다니엘 존스에게 자신이 체험한 비전을 얘기하고 설교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무명의 전도자를 좀처럼 교회는 쉽게 받아 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설교의 기회를 얻은 로버츠는 “성령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나가도 좋습니다”라고 담대히 도전했다. 그 결과 그의 첫 집회는 남아있던 17명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같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17명 모두 회개하고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된다. 부흥의 불길이 웨일스의 모리아 교회에 떨어졌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첫 집회 이후 30일 만에 3만7000명이주께 나아가 회개하고 놀랍게도 5개월 만에 웨일스 전역에서 10만 여명이 교회를 찾게 됐다.
특히 그의 성령집회에는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거 참석했는데 그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훔쳐온 연장을 돌려주거나 함부로 다룬 당나귀를 껴안고 사과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웨일스의 부흥운동은 그 지방의 사회정화운동을 가져와 술집과 당구장이 텅텅 비고 형무소 죄수들에게까지 전도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빌리그래함목사는 “나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거짓된 종교문제라고 생각한다. 교회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그 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 하였고 거듭나지 못 하였고 회개도 하지 아니 하였다.”
거듭나면 욕구가 달라집니다. 기도하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찬송의욕구가 생깁니다. 예배가 즐겁습니다. 교회에 오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생깁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죄를 회개하고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다면 거듭난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회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화려하고 웅장하게지은 건물이 좋은 교회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많은 교회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거듭남으로 천국을 소망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2018년 9월 2일 새믿음교회 정영진목사 주일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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