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출발 /창12:1-9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이후에 에덴동산에서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 온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죄를 쫓아 살아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침내 노아시대에 이르러 온 땅에 죄악이 관영하고 부패하고 타락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후손인 셈, 함, 야벳을 통하여 이 땅에 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번성하게 되자 인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함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아서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각 민족과 각 방언대로 세상에 흩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자들은 악한 길을 따르도록 하고 급기야 하나님께서 셈 계통의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환상을 주시면서 믿음의 출발을 하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저는 이 시간 ‘믿음의 출발’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1) 믿음은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창세기11:27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의 가족이 소개됩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사도행전7:2-3에 보면 스데반이 공회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라크 지역입니다. 갈대아 우르라고 하고 하는 지역은 이미 고고학자들의 발견으로 알려진 고대 메소포다미아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이 지역은 상당한 도시문화가 발달 했으며 상수도 하수도 등 도시기반이 잘 갖춰진 고대 도시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난나’라고 하는 달신을 섬기는 지역이었습니다. 고대세계에서는 범신론 적이고 다신론 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는데 아브라함의 고향은 ‘달신’을 섬기는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이 곳에서 아브라함의 가족은 어떻게 생활하였을 까요. 지금도 우상이 많은 나라나 도시에 가보면 그 주변에서 우상을 깍아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팔아서 경제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드는 자였습니다. 많은 우상들을 만들어서 자신의 창고나 마당에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 간 사이에 하나님을 경외하던 아브라함은 지혜를 얻어 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데라가 만들어 놓은 우상들의 팔 다리를 다 부러 뜨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가장 큰 우상의 손에 망치를 묶어 놓았습니다. 얼마 후에 아버지 데라가 들어오더니 아브람을 불렀습니다. 여기 있는 우상들의 팔 다리, 머리가 떨어져 나갔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아브람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아버지, 글쎄 저기 큰 우상이 망치를 가지고 다른 우상들의 팔다리를 다 부수어 놓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았어요. 이 말을 듣더 아버지 데라가 화를 버럭 내면서 ‘아브람아, 아니 움직이도 못하는 저것들이 무슨 망치를 가지고 부러 뜨려 놓았다는 것이냐, 아버지한테 속이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라. 아브람이 데라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말씀 잘하였습니다. 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저 우상들이 어떻게 복을 준다고 사람들에게 헛된 우상을 팔아야 되겠습니까? 그리고는 아버지 데라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자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셔야 했던 것은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데라는 도시문화가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우상을 만들면 얼마든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기에 쉽게 우상의도시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데라가 우상의 도시에 머물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하란’을 데려 가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젊은 나이에 죽게 되자 데라가 그곳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됩니다. 창11:31절에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인데 아버지 데라는 아들 생각이 났는지 아들 이름과 똑 같은 ‘하란’에 머물렀습니다.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와 함게 하란에 머무른 세월이 60년이었습니다. 거의 60년 동안 하란에서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아버지 데라를 205살 까지 살게 하시고 하나님이 데려 가십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이 죽자 데라가 떠났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데라를 데려 가시므로 아브람이 가나안 땅을 향해서 떠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데라가 죽자 하나님께서 메소포타미아에 나타나신 것처럼 다시한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본문1-2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는 60년 동안 살아왔고 그곳에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쌓았던 인간관계나 경제적 여유나 풍요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이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과거의 죄된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생활해왔던 과거의 가치관, 삶이나 생활습관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사귐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달콤함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5:16-2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믿음의 출발은 죄에서 떠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2) 믿음은 순종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도 믿음이란 반드시 순종이 요구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21:28-31절에서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나와 함께 일하자 했더니, 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하고 오지 않았고 둘째 아들에게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나와 일하자 했더니 아버지 싫습니다, 하고는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고 하면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말할 것도 없이 둘째 아들이지요.
야고보 선생도 약2:14절 이하에서 만약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도 말로만 ‘평안 하세요’ ‘맛있는 것 드세요’ ‘날씨가 추우니 따뜻하게 옷 입으세요’하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약1;22에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하였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요구합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하나님께서 심판 하실 때 기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2:23 하반절에 보면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아브라함도 만약에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셨을 때 떠나지 않했다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가의 모래처럼 번성하였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였을 때에 우상의 도시를 떠났고 60년 동안 하란에 살아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인간적 혈연관계가 끈끈한 지역을 떠나라 했을 때도 아브라함은 떠나서 갔다고 말씀합니다. 할례를 요구하였을 때도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였을 때도 아침 일찍 사환들과 함께 모리아산에 올라갔습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양 날개와 같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동반합니다. 순종하는 믿음을 가질 때 그 믿음이 비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4절에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 오세 였더라”
여기서 보면 아브람함과 롯의 신앙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따라 갔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을 따라 가면 안됩니다. 세상을 문화나 가치관이나 생활이나 유행을 따라가면 망합니다. 요즘 세계적인 운동선수들이나 연예인들이 몸에다 문신을 하는 것이 유행인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소위 ‘타투’를 합니다. 뿐 만아니라, 최근에 문재인 헌법 재판관, 대법원장의 후임자들이 동성애에나 동성혼 결혼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타락한 사회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가치관, 기독교 가치관에 위배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세속적인 가치관과 기독교 가치관이 충돌할 때 애매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됩니다. 최근에 중소기업청장에 임명된 포항공대 박 모 교수가 기독교인 인데 ‘창조론’에 대해서 여당, 야당들이 지적하자 애매모호한 태도로 자신은 기독교인이지만 이념이나 사상적으로 깊이 관여한 것은 아니고 신앙적으로 창조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왕의 주는 진미와 포도주가 우상의 제물이었기에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옳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면 우리는 단호히 배격해야 하고 따라 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쫒아갔습니다. 하지만 롯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을 쫒아 갔씁니다. 즉, 사람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롯과 같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갑니다. 말씀이 가라는 것 까지 가고 말씀이 서라는 곳에서는 것입니다.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복종합니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 해입니다.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습니까? 천주교가 말씀을 따라 가지 않고 교황권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친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내세우고 3대 슬로건을 내 걸었습니다. 첫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은총 (Sola gratia)
믿음의 사람은 말씀을 따라 갑니다. 아니 말씀에 순종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말씀대로 사니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되고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떠나라 하였을 때 자신의 유 불리나 이익을 계산 하지 않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이사야41:8에서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하셨고 약2:23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또한 105편42에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 19:29에서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11:8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출발을 하기 위해서 먼저는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말씀을 쫒아 갈 때 우리의 삶이 안전하고 평안하며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롯처럼 사람을 따라 가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쫒아 가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9월 17일 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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