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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와 비둘기 창8:1-12

gkffpffndi 2017. 7. 28. 14:23

까마귀와 비둘기 창8:1-12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 사람들을 물로써 심판 하신 이유는 그 땅의 사람들이 포악하고 잔인하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짐승과 버러지 같은 형상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입니다. 1;23 (개역한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즉 도덕적 영적 윤리적인 것이 파괴되어 인간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 신의 성품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적이고 전 지구적으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짐승과 육축과 살아 있는 모든 생물에게 내려 진 것입니다. 40일 동안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깊음의 샘들이 터져서 40일 동안 주야로 내렸으니 창조 이래로 이런 환난이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가족 여덟 식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당대에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의 가족을 위해서 구원의 방주를 만들도록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했을 때 노아는 불평 불만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기꺼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 방주가 노아의 가족을 홍수에서 구원 한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 1년 가까이 있는 동안 얼마나 불편하였겠습니까? 수많은 가축들이 배설하는 배설물로 인하여 코를 찌르고 불편한 냄새가 진동하였을 것입니다. 빨리 물이 감하여 육지에 내려가서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 노아의 불편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드디어 오늘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여기서 기억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카르인데 이 말의 뜻은 평소에 잊었다가 갑자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아의 가족에 대하여 한 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저 불편한 방주 생활에서 언제 나오게 할 까 생각하면서 때를 찾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을 이렇게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사야49:15-16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구원 받은 자기 백성을 늘 마음에 품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그 분께서 우리의 문제에 개입하시고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에 간섭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원치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문제를 가져가지 않고 내가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꼬이고 잘 풀리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심령 깊은 것 까지 감찰하시며 앉고 서는 것을 아시며 일 거수 일 투족을 다 아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방주 생활이 불편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땅위에 바람을 불게 하셨습니다. 바람을 불어서 육지에 가득찬 물을 줄어들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과학적인 말씀입니까? 누가 성경이 비과학적이라고 말합니까. 여러분, 빨래를 어디다 말립니까? 물론 햇볕에 말리지만 바람이 불어야 물기가 달아나는 것입니다. 선풍기 바람이나 드라이 기계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오니 땅에 쏟아졌던 빗물이 마르기 시작했고 그리고 깊음의 샘인 지하수와 하늘의 창문을 하나님이 닫아 버리니 비가 더 이상 오지 않고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150일 후에 줄어들고 방주가 일곱째 달 17일에 아라랏 산에

방주가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물이 줄어서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천하의 높은 봉우리들이 다 잠겼는데 이제 그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희망의 시대가 도래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3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심했을 때 엘리야 갈멜산 꼭대기에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히 7번 기도하였더니 바다 건너편에서 손바닥 만한 비구름이 올라오더니 점점 커져서 큰 비가 내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가 쏟아진 거와 같은 겁니다.

 

여러분,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정치에서 경제에서도 교육에서도 심지어 종교에서도 이 시대는 희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에게서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열강들이 각축장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베를린에 다녀와서 뭐라 말했습니까? 뭔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여러 가지 구상을 내 놓았지만 약소국의 한계를 느꼈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시진핑하고도 아베하고도 심지어 우리의 우방인 미국의 트럼프 하고도 뭔가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정은 하고 대화의 채널을 열어 놓았다고 시그널을 보냈지만 북한은 묵묵부답입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희망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대한민국이 여기 까지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대한민국을 지켜 주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천하의 큰 산이 보이고 40일이 지나고 노아가 창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방주 안에 있기에 지금 지면이 어떤 상태 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차로 까마귀를 내 보냈습니다. 까마귀를 1차로 내 보낸 이유는 물이 감한 정도를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잘 잊어버리는 사람을 가리켜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이렇게 비아냥거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까마귀는 머리가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 엘리야 시대에도 보면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창세기 86-7절에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보내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까마귀를 선택한 것은 방주 바깥 세상에 나가서 물이 감한 여부를 노아에게 알려 달라고 하는 사명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까마귀는 방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그저 오랜 동안 방주 안에 갑갑하게 있어서인지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날아 왕래 하였더라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방주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방주 주변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래 왕래 하였던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까마귀는 바깥에 나가 있어보니 홍수로 말미암아 죽은 가축과 짐승의 시체가 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방주 안에 있으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썩은 시체와 썩은 고기를 실컷 먹고 배가 부르는데 방주에 굳이 들어가서 고생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면 가축의 배설물로 더럽고 오염되어 냄새가 지독하여 그저 빨리 세상에 나오고 싶었던 것이기에 자신의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배고프면 다시 날아가서 썩은 고기를 먹고 방주 주변에 머물기를 반복하였던 것입니다.

 

노아가 까마귀를 먼저 방주에서 내 보낸 것은 땅의 건조 여부를 알아보라는 것인데 그저 썩은 시체에 정신이 다 팔려서 자신의 사명을 망각한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 당할 때 모든 육축과 짐승이 사람이 심판 받을 때 특별히 선택받아 까마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까마귀는 다른 동물보다도 먼저 세상에 나갈 수 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까마귀는 자기 사명을 망각하고 오직 먹고, 마시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구원의 방주인 교회 안에도 까마귀와 같은 신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까마귀 신자인가? 까마귀 신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까마귀 신자는 옛 사람 그대로입니다. 예수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하는데 그렇치가 못합니다. 내가 살아 있습니다. 옛 성품이 죽지 않았습니다. 둘째, 까마귀 신자는 사명 감당에 충실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 해 주신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데 보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망각한 자로 살아갑니다.셋째, 까마귀 신자는 교회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교회의 행사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거나, 곤란에 처해 있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까마귀 신자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유익에만 관심을 보입니다.넷째, 까마귀 신자는 세상과 교회를 부지런히 왕래합니다. 까마귀가 방주 주변에 머물러서 방주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방주 안에 깊숙이 들어오지 않고 주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 예수 안에 깊숙이 들어오지 않고 먼발치에서 그저 바라만 봅니다. 까마귀가 방주 주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언제나 교회 주변에 머물러 있지 중심에 들어와서 봉사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다섯째, 까마귀 신자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아니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만 언제나 빈손입니다. 자기 사명을 망각했으니 전도의 열매가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니 감사의 열매가 없습니다. 이런 신자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육에 속한 자,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유다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1: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으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까마귀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자 노아는 이번에 비둘기를 내 보냈습니다.

 

까마귀를 통해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아내지 못한 노아는 비둘기를 밖으로 내어 보냈습니다. 창세기 88-9절에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온유, 순결, 순종, 그리고 성령을 상징하는 대명사입니다. 노아가 세 번 비둘기를 내 보냈는데 첫 번 째는 접족할 곳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접족이란 발바닥을 착지 할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물이 아직 감하지 않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비둘기는 썩은 고기와 시체로 가득한 그 땅에 머무를 수 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둘기는 방주로 돌아와서 노아가 내미는 손을 받아들여 방주에서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비둘기에 있어서 방주는 휴식처요 안식처입니다.

 

방주는 오늘 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치고 고단하고 힘든 인생이 쉴만한 곳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썩은 냄새가 풀풀 나는 세상에서는 그 영혼이 쉴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와서 안식을 누렸듯이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성령 안에서 교회 안에서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찢기고 상한 심령이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은 교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 와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생수의 강이 흐릅니다. 평강의 샘이 솟아납니다. 십자가 아래에 하나님의 은혜가 흐릅니다.


7일후에 다시 비둘기를 보내니 이번에는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을 물고 왔습니다. 물이 감해졌느니 주인님 이제 땅에 내려 오셔도 무방합니다. 안심하십시오. 그 말입니다. 비둘기는 은혜에 보답했습니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잘 감당했습니다. 노아는 또 7일을 기다린 후에 비둘기를 내 보내자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노아는 물이 완전히 물러 간 줄 알았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교회 안에도 비둘기 신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둘기 신자인가요? 첫째, 비둘기 신자는 늘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시편기자 다윗처럼 시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날마다 구원 받은 은총을 기억하며 보답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둘째, 비둘기 신자는 자기 사명에 충실합니다. 복음전파의 사명, 봉사의 사명, 기도의 사명에 충실하며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합니다.


셋째, 비둘기 감람나무 잎을 입에 물었듯이 언제나 기쁜 소식을 가져 옵니다. 비둘기 신자는 교회에 들어 올 때 빈손으로 들어오지 않고 언제나 감사의 예물을 손에 가지고 옵니다

골3:16-17“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하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힙 입어 하나님아버지께 감사하라.

 

 

넷째, 비둘기 신자는 까마귀신자처럼 교회 주변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중심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합니다.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예수 중심, 교회중심, 말씀중심, 예배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예수께 붙어 있으므로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골3: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비둘기 신자는 세상에서는 기쁨과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방주, 교회 안에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감사와 기쁨이 충만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바울은 성령에 속한 자, 성령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까마귀는 육신에 속한 자, 비둘기는 성령의 사람의 모형입니다. 교회 주변에 머무는 신앙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교인이 되었다면 까마귀처럼 세상과 교회를 왕래하는 자가 아니라 까마귀처럼 세상의 썩은 것에 관심을 갖다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 사명을 잊어버려 마지막 날에 책망 받는 자가 아니라, 비둘기처럼 감람나무 잎을 물고 와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비둘기 신자,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7730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