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마21:1-11)
마21:1-11 마태복음21-27장 까지의 내용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일, 즉 성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에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은 고난주간 첫째 날인 일요일에 있었던 사건으로서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서 구속주로서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들에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동안은 자신의 실체를 숨기셨지만 마지막 공생애 한 주간을 남겨주고 자신이 만왕의 왕이시며 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와 승리의 왕으로 입성하신 일요일부터 성 금요일 까지 한 주간을 수난 주간(Holy Passion Week)이라 부른다. 마태는 이 기간의 사건을 마태복음28장 가운데 무려 일곱 장을 할애해서 기록한 것은 마지막 수난주간이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인간의 죄 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으로 인류에게 최대의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한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곳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감람산부근 벳바게 마을이다. 뱃바게 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촌락인데 이곳은 역사적으로 메시야와 관련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곳이다.
이러한 예언은 이미 예수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슥9:9절에 이스라엘의 왕 메시야가 입성하시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해 주고 있었습니다. “시온의 딸들아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르라. 보라 너희 왕이 임하시리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도다. 그 왕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되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리로다” 이러한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은 이곳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십니다.
1-2절에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평화의 왕이심을 알리기 위해서 평화 시에 이용하는 나귀를 준비시키는 것이다. 예전에 폼페이 장군처럼, 황제 아구스도처럼 백마를 타지도 않았고, 혹은 군악대나 대단한 퍼래이드를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에 예언을 이르시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복군의 황제가 아니라, 이 땅에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정확히 유월절 닷새 전이었습니다. 그는 감람산에 오르면서 두 제자들에게 부탁합니다. 자, 건너편 벳바게 마을에 가면 곧 매여 있는 나귀 새끼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풀어 가져 오너라. 그리고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풀어 가져온 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마지막 수난 주간의 사역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므로 당신이 만왕의 왕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백마가 아니라, 아직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심부름을 한 주님의 두 제자들입니다. 여기서 두 제자의 이름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참 곤란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집에 가서 그것도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소유의 ‘나귀’를 ‘주가 쓰시겠다’라고 해서 그 나귀 주인이 줄 수 있겠는가 이다. 그런데 두 제자는 6절에 보면,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은 두 제자가 어떤 이의나 불평도 없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의견이나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자신의 생각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두 제자는 자신의 생각보다 주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명이나 일을 주실 때는 감당할 만한 힘도 주실 줄 믿고 순종하기만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순종하면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열 두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그렇고,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 졌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적사건, 사르 밧 과부가 마지막 남은 기름 한 병과 밀가루 한 움쿰을 자신이 먹지 않고 하나님의 종에게 먼저 먹게 함으로 3년 동안 기름과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은 것도 주의 종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그것 뿐 아니라, 아람장군 나아만이 문둥병이 걸려 엘리사에 왔을 때 주의 종이 나아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했을 때 불평하고 원망하고 자기나라로 그냥 돌아갔다면 문둥병은 치료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의 종에 말씀대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니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창세기18:14에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런데 제자들이 나귀 주인에게 가서 무어라고 말하라 하였습니까? ‘주가 쓰시겠다’하라. 여기서 ‘주’는 헬라어로 ‘호’ ‘큐리오스’인데 이 뜻은 ‘주인’ ‘지배자’란 뜻을 가지는데 ‘사용주’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뜻은 ‘나귀’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줍니다. 외형적으로는 나귀와 나귀의 주인이 베다니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진정한 주인이 아니고 단지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큐리오스’는 예수가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소유주’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과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주님이 나의 소유주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께 드리는데 있어서 인색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넉넉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말씀하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것은 나귀의 주인입니다. 이 사람은 나귀를 한 번도 부려보지도 못했습니다. 타보지도 못했습니다. 나귀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자기의 소유인 나귀를 바로 만물의 주인인 주님께 바로 드렸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드렸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주셨는데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드렸습니까?
여기 두 제자들이 풀어 가져온 나귀새끼는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새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귀가 교통수단에 이용되었습니다. 짐도 실고 사람도 먼 길을 갈 때 이용했습니다. 주님께 드려지는 것은 언제나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용하지 않은 새 나귀였습니다. 그리고 나귀와 새 나귀새끼이지만 그대로 그것에 올라 탈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더럽다고 사람들에게 옷을 벗어서 나귀의 등에다 깔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의 등위에 덮어 얹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그 위에 앉으셨습니다. 그 결과 무리들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길바닥에 깔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옷으로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카페트를 깔아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길에다가 까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겉옷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광야에서 노숙할 때는 이불을 하고 평상시에는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거의 다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외출 시에 겉옷은 상당히 귀한 것을 입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귀한 겉옷을 벗어서 나귀의 등에 얹고, 대다수의 무리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예수님이 타고 가는 나귀가 가는 길에 깔아 들인 것은 그들은 예수님이 왕으로서 오시는 것에 대하여 최고의 예우를 한 것입니다. 왕하9:13절에 북 왕국 이스라엘 왕이 반란을 일으켜 등극할 때 사람들이 자기의 옷을 벗을 벗어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예후는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이러한 행위는 왕에 대한 예우였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의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은 흡족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나아가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9절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은 곳에서 주의 이름 찬양, 다 찬양하라. 귀하신 나의 주 하나님 호산나 높이 부르세” 여기서 ‘호산나’란 뜻은 ‘우리를 구원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압제 밑에서 고난당하였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시면 자신들을 이러한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의 민족에게 해방과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해방과 자유를 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해서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열렬한 환호와 박수와 영접을 닷새 후에 완전히 바꿔어 졌습니다. 예수가 로마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로마군인에 의해 힘없이 끌려가고 잡혀 있는 예수를 향해 그들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로 소리쳤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였지 진정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로 영접하지 안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면서 주님을 찬양했지만 그들의 본질, 즉 속사람을 아직 변화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그들의 인격과 생활과 말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난주간 기간 동안에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을 때에 한 300데나리온 되는 귀한 순전한 나드 향유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발에 붓고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 중 하나인 가로유다는 뭐라 했습니까? 이 향유를 어찌하여 허비하느냐, 차라리 팔아서 가난한 자를 위해서 주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이 때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막14:6,8,9절에 예수님이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 하였느니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메시야로 받아들인 사람은 삶에 분명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내 삶에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내 삶에 중심에 언제나 예수가 중심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아 장차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과 봉사와 헌신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도 감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그렇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하고 찬양했던 사람이 주님이 로마 군병들에게 끌려서 갈보리 십자가 언덕위에서 고난당하실 때 모두가 다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저를 십자가에 매달으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 예수를 자신의 왕으로 마음에 영접하지 않했기에 예수가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자 과감히 버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앞장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의 행태입니다.
예수님도 마7:18-20에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느니라. 눅6:46에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본문10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이 사람이 누구냐, 거기에 온 사람들은 예수를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라고 고백하시겠습니까?
종려주일의 의미는 2000년 전에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당신은 진정한 우리의 왕이십니다. 라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겉모양만 모세를 모방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정반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 예수를 나의 진정한 왕으로 영접하였습니까?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생각과 가치관과 인격이 달라집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 먹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사람은 예수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타마귀를 영접하면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일만 합니다.
‘예수가 누구냐’는 기독교신학의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전체주제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으로 평화의 왕이시오,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요, 메시야로 만왕의 왕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종려주일에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나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 분을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그 분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분의 명령에 두 제자처럼 순종하고 나귀주인처럼 헌신해야 합니다. 그 분을 위해서 생명도 바칠 수 있는 주님의 참제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6년 3월 20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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