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요8:1-11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아침에 성전에 들어오시니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나아오기를 시작하였고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기를 시작 하였다. 여기서 성전은 아마도 이방인의 뜰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전에서 매매하며 장사하였던 그 장소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제사 드리기 위해서 왕래 하던 곳이기에 많은 군중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 앞에 세우고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여, 이 여인이 현장에서 간음 하다가 저희들에게 잡혀 왔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모세는 이런 간음한 여자는 돌로 치라 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세라고 말함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레위기20,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22,21,22절은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일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중요시 합니다. 그들은 율법, 즉 토라(모세오경)를 아주 귀중히 여기고 수 천 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신명기6,4-9인‘쉐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쉐마’는 이스라엘의 가정교육의 핵심입니다. 핵심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다신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에도 수많은 신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인 신이 아니고 오직 유일무이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새기고 항상 그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표시로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수 천 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정통 유대인들은 이러한 복장을 하고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절을 하고 기도를 하는 민족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중요시 하는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의 삶의 기준이고 도덕이고 행동양식입니다. 삶의 전 영역이 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비록 로마의 압제아래 있었지만 로마는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삶을 제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앞에 놓인 이 간음한 여인에게 율법을 적용시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면서 종교재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재판을 하는 곳이 있었는데 ‘산헤드린 공의회’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종교최고 재판회의로서 사실상 민, 형사상 재판기구입니다. 의장은 대제사장,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종교재판기구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율법에 어긋난 말을 하게 되면 곧 바로 고소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6절에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한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 함 일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였다면 예수는 자신이 가르친 사랑에 법에 위배되는 것 일 뿐 아니라 그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기에 사형을 즉각 거행할 수 없기에 정면으로 로마법에 위대되어 체포되어 갔을 것입니다. 반대로 ‘용서하라’고 하였다면 그 당시 유대 율법에 반하는 것이므로 군중들의 비난과 박해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계략을 아신 주님께서는 어떤 행동을 취하였습니까? 6절하반절에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바로 해답을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말씀하시고 땅에다 무언가를 쓰신 것은 과도한 흥분과 감정으로 차 있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행위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금방이라도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돌을 들고 죽이려고 광적인 분노와 흥분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죄인이 죄인을 죽이는 엄청난 죄악입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심판과 정죄가 목적이 아니고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시지 않는다면 율법대로 심판한다면 여기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실수와 범죄는 자신들의 허물과 죄악인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가지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지도자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지도자들의 배후에 사탄이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6절에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 함이러라”마태복음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굶주리시고 광야에 나갔을 때에 누가 나왔습니까? 3절에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우리는 분노하고 정죄하는 배후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4.16에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의 시기와 질투로 빌라도 총독에 넘겨졌을 때 명절이 되어 죄인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어서 빌라도가 예수의 죄 없음을 알고 백성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 라고 물었을 때 군중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의 조종을 받아 내가 누구를 놓아주랴, 바라바를 놓아 주소서 하여, 빌라도가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이르되 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이게 무슨 말이냐 예수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백성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였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보니 잘못 말했다가는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것 같아서 민란이 일어 날 것을 염려하여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고 이 사람의 억울한 피 값에 대하여 그 죄악을 너희가 당하라고 말하자 그들이 말하기를 25절에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 장로들의 시기와 질투, 악의와 분노로 폭발한 대중으로 인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된 것입니다. 많은 대중들이 모여 드는 곳에는 차가운 이성과 냉철한 가슴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다수 대중들의 분노와 증오는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흥분한 대중을 조종하고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여론을 호도하는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결국 세상은 죄 없는 자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사탄이 활동하는 무대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자가 조종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세상의 문화를 통해서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 한류 문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한류문화에는 음식, 의복, 언어, 음악이나 드라마 태권도 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 알려져서 전 세계에 나라들이 한국 사람을 좋아해서 이슬람권에서도 한국 사람을 아주 좋아 한다고 합니다. 한류문화로 인해서 대한민국이 알려져서 세계선교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류 문화가운데 케이 팝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슨 소녀시대니, 젊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여자가수들이 추는 춤을 보세요. 음란한 복장에 음란한 제스처에 음란한 가사들이 여과 없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중문화를 통해서 음란 문화가 양산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음란 문화를 전 세계에 퍼트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어느 자매를 만났는데 서울에 가면 대학생들은 술, 마약하는 것은 보통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임금을 사탄이라고 말합니다.
요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마지막 때가 되면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다 하는 시대가 올 것을 이사여 선지자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즉 가치관이 혼돈된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바울은 마지막 때의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롬1,28-30“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하는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바로 하나님이 없는 시대에 나타나는 것은 분노와 증오와 미움과 시기와 타인에 대한 적대감입니다. 정치인들은 이러한 대중들의 분노를 교묘히 이용하여 사회와 국가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이러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부패와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타락과 탐욕으로 인해서 갈수록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가 확연히 나타나고 청년들의 일자리가 없어져서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유명 대학을 나와도 취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몇 해 전 미국의 뉴욕에서는 대학생들이 나와서 뉴욕도시를 점령하였습니다. 갈수록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된 것은 잘못된 제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작가인 스테판 에셀지은 <분노하라>는 책은 전 세계 40여개국에 3500만부가 팔렸다. 이 책은 오늘 날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부패, 그리고 이 세상의 악에 대해서 침묵하지 말고 참여하라고 말합니다. 분노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분노는 더 나은 세상으로 결코 변화 시키지 못합니다. 분노는 폭력과 무질서와 혼란과 분열과 적대감만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들고 서 있는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자 거기 분노로 가득 찼던 사람들이 양심에 찔림을 받아 노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 까지 한 사람 한 사람씩 다 가고 오직 예수와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다 무슨 글씨를 썼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거기 모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를 하나씩 하나씩 나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은밀한 죄를 주님이 써 내려가자 그들은 들었던 분노와 증오의 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자신의 죄를 발견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 앞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작은 티를 빼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질책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죄, 들보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은 저들의 정곡을 찌른 말씀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사람들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이 아는 은밀한 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에 대하여 정죄대신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라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과 용서와 관용 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아는 자의 삶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엡 4:32에“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멘
2019년 5월12일 새믿음교회 정영진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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