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2) 창3:7-21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찾아 오셔서 그를 부르신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담이 있는 곳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시고 우리의 앉고 서는 것을 아시고 은밀한 것 까지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오신 것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지만 그런 기회를 아담은 놓쳐 버린 것이다. 에덴동산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수시로 찾아오십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신 이유는 네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처럼 되었느냐, 아니죠. 오히려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 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전에는 친밀한 관계였는데 관계가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볼 수 없어서 스스로 피하여 나무 뒤에 자신을 숨기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서 아주 친밀한 관계였는데 불순종한 이후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뒤 틀려 지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모습이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 왔지만 이제는 두려움의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10절에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게 먹었느냐”
이 물음에는 내가 너에게 말한 것을 거역하고 왜 불순종하여 나와 너 사이에 이런 불편한 관계가 되어 얼굴을 붉히게 하였느냐, 네가 나의 말에 불순종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추궁에 아담은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고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 하였습니다. 12절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먹었나이다”
아담의 행동은 남편답지 못한 비겁한 행동입니다. 자신이 받을 형벌을 두려워 한 나머지 연약한 여자에게 책임을 떠미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아담이 처음 만났을 때 아담이 하와에게 한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창2:21-23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렇게 고백한 아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책임을 추궁하자 그 책임을 자신의 아내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탓입니다. 라고 말했다면 인류역사는 다르게 전개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아담의 죄 성은 계속해서 유전자 속에 숨겨져서 자신이 불리하면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재판이 열리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박근혜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되고 대통령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못할 것 같으니까. 서로 비방하고 폭로하고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 하는 것을 보면서, 비겁한 책임전가의 모습을 보면서 죄 성이 가득한 원초적인 아담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책임을 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요? 아담의 부패하고 타락한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하와에게 물었습니다. 1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의 아내 하와 역시 그 책임을 스스로지지 않으려고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일에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뱀이 아무리 꾀어도 자신이 방어 할 수 있습니다.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하와에게 그리고 은근히 창조주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이 말의 뜻은 하나님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여자를 나에게 주지 안했더라도 이런 사단이 나지 안했을 거라는 거죠?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선한의도를 악한 것으로 돌리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출32:22-24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있는 동안 산 아래 있었던 아론과 백성들이 주의 종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산에서 죽은 줄 알고 아론이 백성들에게 금귀고리를 빼어 가져오게 하고 그것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새기어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진노하시어 모세에게 빨리 하산 하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우상 앞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서 예배하며 절을 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로 받은 십계명을 집어 던져 금송아지 우상을 불태우고 금가루를 물에 뿌려 마시게 하여 그들에게 진노를 나타냈습니다. 그런 이후에 백성의 책임자인 아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1절에 “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말할 때 아론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 책임을 백성에게 돌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2절에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예수님을 사형 선고한 빌라도도 마27:23-26에서 빌라도는 물을 가져와서 자신의 손을 씻으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아담의 악한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범죄 했을 때 그 잘못을 다른 데로 돌리면 안됩니다. 주님,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다 나의 부덕함의 소치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악한 본성을 따라 이런 책임전가의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즉각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 하게 되고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상실한 돼서 오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 째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피조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첫째로는 뱀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하면 뱀이 저주를 받기 전에는 배로 안다니고 어떻게 다녔다는 말인가요? 그런데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그림을 보면 뱀이 다리가 있는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뱀에게 다리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흙을 먹을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흙속에 있는 벌레를 잡아 먹는다고 합니다. 두 번 째는 뱀에게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남자의 후손입니다. 남자 없이는 한 사람도 태어 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즉 예수님만이 여자의 몸만 빌려 성령으로 잉태한 ‘여자의 후손’인데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치명상을 입히실 것을 예언 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요한일서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 난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 째는 하와는 해산의 고통으로 자식을 낳을 것이고 남편은 너를 다스리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평생에 이마에 땀을 흘러야 먹고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번 째는 인간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자연계가 저주를 받아 땅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인간이 범죄 하기 이전의 자연계는 인간에게 최적의 자연 환경과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지만 인간이 범죄 함으로 인해 자연계는 파괴되고 자연이 인간을 위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8: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왜요?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가뭄과 태풍, 이상기온과 온난화 현상으로 우박이 떨어져서 고통이 가중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2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과 인간은 원래 원수된 관계가 아닙니다. 하지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범죄한 결과의 상태는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처럼 인간과 동물과 자연계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아래 놓여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6:1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고 범죄한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시기 전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가죽옷은 어디서 구했을 까요? 가죽옷은 동물의 가죽입니다. 즉 동물을 죽여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준 옷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은 옷이 아닙니다. 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치마는 영구적인 옷이 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수치를 가리 우기 위해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나뭇잎은 햇빛이 나면 다 말라 없어집니다.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면 자신의 수치를 가리워 주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만든 무화가 나뭇잎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은 인간의 율법, 도덕, 선행이나 윤리, 고행, 수양이나, 금식을 가지고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덮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기에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온 것은 죄의 삯이라고 말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죄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고 영생복락을 누릴 수 없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동물이 대신 죄인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즉 피흘림이 있어야 인간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죄 값이 이렇게 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죄를 용서 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로 본문22절의 ‘가죽옷’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엡2: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죄인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죄인으로 죄를 속할 수 없기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십자가위에서 희생양이 되게 하셔서 십자가의 피로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밖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그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시도는 무화과나무 잎처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롬10:11절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롬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지금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부름에 자기변명과 남에게 책임을 전과하지 않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함으로 하나님아버지의 긍휼과 은총을 힙 입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7년 6월 11일 청주 벧엘 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
'.........은혜의 말씀 > ...새믿음의 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신명기32:7 (0) | 2017.06.24 |
---|---|
생명의 떡이신 예수 (요6:22-51) (0) | 2017.06.16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막2:13-17) (0) | 2017.06.03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3:7-21) (0) | 2017.05.26 |
21세기 선악과 (이사야58:13-14) (0) | 2017.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