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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을 향하여 히 11:7-16

gkffpffndi 2020. 10. 16. 22:10

본향을 향하여 히 11:7-16

 

이제 제법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도로위에 낙엽이 떨어지고 바람에 나뒹구는 것을 보면서 올해도 벌써 다 지나가는 구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젊었을 때는 세월의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몸이 아프거나 건강치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인생의 유한함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계절입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하는 것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느냐 하면 자꾸 과거를 뒤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젊었을 때에 즐거웠던 때, 젊었을 때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내던 때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끔식 아파트나 길거리에서 젊은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하고 행복하게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젊고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젊음에 대한 아쉬움과 슬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가끔식 고향을 방문합니다. 그것은 고향을 떠나 온지가 오래 되었고 아직도 어렸을 적에 추억거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 다녔던 교회도 남아 있고요. 어렸을 때 손수건 달고 입학하고 운동장에서 운동회를 했던 그 초등학교도 그대로 있기에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지만 어렸을 적에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면서 고향의 향수에 젖고자 가끔식 달려가는 것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 때문 일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제가 어렸을 적부터 주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까지 다녔던 믿음을 키웠던 고향의 교회를 다녀왔는데 이제 더 이상 고향 교회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부지를 팔아 외지에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수구초심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죽을 때면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용사들은 본향을 그리워했습니다. 믿음의 용사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등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의 삶에 대하여 한 마디로 본향을 그리워하는 삶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의 삶은 철학자의 말로 빌리면 실체가 아닌 그림자로 보았고 본문13절에서 말한 것처럼 외국인으로 나그네로 삶을 살다가 자신의 영혼의 고향을 그리워 하다가 본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의 피를 받아 태어납니다. 부모나 형제나 자녀들에 대한 육신적인 정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육체의 정욕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는 인간의 문화나 문명을 성의 문화로 규정할 정도로 인간의 성적욕구인 리비도에 의해서 인류의 문명이 탄생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인간의 육체의 정욕과 욕망은 인간의 죄 성에서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든 문화는 죄의 문화인 것이다.

 

최근 세계적인 팝스타에 이름을 올린 BTS, 소위 방탄소년단 빌보드 챠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빌보드소셜50 챠트 역사상 최초로 200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우리나라의 노래가 세계적인 것으로 인정받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여자 아이돌 가수들도 앞 다투어 세계적인 무대에서 수상을 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그들의 영향력을 보았을 때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파급력과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데 그러한 대중들의 스타들의 노래하는 모습이나 옷차림 등을 통해서 볼 때 많은 청년들의 영혼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이세상의 화려함과 현란한 조명아래 펼쳐지는 현란함 춤과 음란한 이러한 모습들은 더욱 더 소돔과 고모라처럼 죄악에 머물게 하고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잊어버리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타락하고 음란한 이 세상의 문화나 문명속에서 살아 갈 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속에서 살았던 롯이 바로 그러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마음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문화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외국인들이 200만 명이 들어와 살 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에 대한 처우가 많이 개선되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의료보험혜택도 받고 여러 가지 혜택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아픔과 주류사회에 들어오기까지는 많은 제약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외국인들은 이방인입니다. 차별이 존재합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예수를 믿게 되면 부모나 형제 가죽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그리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로마시대에는 땅과 재산을 빼앗기고 쫓겨나고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였습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미국에서도 코로나로 인해 주마다 규제하는 게 다른 것 같습니다. 한 주에서 일어난 영상을 유트브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실내에서 예배를 못 보니까 야외에서 교인들인 찬송을 부르면서 예배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 간의 간격도 띠어 이었습니다만 어디서 나왔는지 경찰들이 나타나서 교인들을 하나씩 수갑을 채우고 데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교인들이 수갑을 채이면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순수히 체포되어 갔습니다. 유트브 자막에는 미국에서는 지금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전혀 저항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있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 방역으로 인해 교회가 핍박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교회도 주민센타 직원이 나와 확인 했습니다만 어느 교회는 교회를 예배드린다고 지역주민들이 고발하여 경찰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는 교회 안에 들어와서 50명이 넘는지 안 넘는지 세어 가면서 확인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커피숍이나 식당, 전철에 가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추석연휴에는 제주도에 40만 명이 왔다 갔는데 한 사람도 감염이 안 되었다고 보도 하면서 교회는 대상으로 소규모 모임도 하지 말아라, 밥도 먹지 말아라고 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지금 복음의 시대가 서서히 닫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사건들이 여기 저기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대하여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4:9-10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환난과 박해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는 너무나 오랫동안 평안한 믿음생활을 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평안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과 함께 잡으러 왔을 때 주님은 눅22:6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지금 온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미 예언하였습니다. 22절에서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며 여호와와 기름부음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이러한 시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차별금지법을 통과 시켜 복음을 바로 전할 수 없도록 법제화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국회에 올라가 있습니다. 표결에 붙여서 통과되면 교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갈 수 있습니다. 차별이란 이름으로 복음을 반대하고 기독교를 역차별하는 법안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전도하면 감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평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우상을 만들어서 풍요하고 넉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곳에 일가친척이 있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집이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지체 없이 떠나 수천 키로를 지나 땅 설고 낯설고 물 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순종의 본을 보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기근이 들어 애굽에 내려가다가 애굽의 왕에게 자신의 부인 사라를 뻬앗 길 뻔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100세에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받은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산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 앞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그 즉시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신의 아들을 산채로 묶어 재단에 올려놓고 칼을 잡아 죽이려 할 때 하나님께서 급하게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야 나를 사랑하는 줄 아노라 하시면서 아브라함을 인정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떠나라 하였을 때 떠나고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하였을 때 바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이 세상을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았으며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에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이 세상을 본향으로 생각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림자요, 헛것이요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이세상의 재물 때문에 욕심을 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기에 조카 롯에게 물이 넉넉한 소알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양보한 것입니다. 본향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세상의 권력이나 재물이나 지위 돈 명예는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요? 이 세상은 썩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후3:10-13절에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하나님이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세상은 없어지고 우리 앞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4:2-3절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처는 킹 제임스 번역에 의하면 ‘country’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는 본문에 한 성 즉 ‘city’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막연한 게 아니고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인 노아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 나라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기에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네 순레자로서의 삶을 살아 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소망은 이 땅이 아닙니다. 저 하늘 위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좋은 본향이 있습니다. 더 나은 집이 있습니다. 더 나은 도시가 있습니다. 더 나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늘의 왕국을 사모한 것입니다. 더 좋은 것들은 다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하늘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빌1:23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미련을 갖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본문15절에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10,16절에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이들은 이 세상에 삶을 순례자로서의 삶으로 알고 살았지 본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결국은 세상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졌기에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진 고난과 핍박과 박해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이 결국은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아니 했습니다. 10:39절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오늘 이 시대는 믿음에서 떠나는 시대입니다. 왜 그렇까요, 하늘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정 때문에 교회를 떠납니다. 남편 때문에 부인 때문에 자녀 때문에 교회를 떠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형제가 보기 싫다고 떠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5:15절에 이미 사탄에게 돌아 간자도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환란과 핍박이 와고 교회를 떠나면 됩니다. 떠나는 순간 마귀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4-5세기의 유명한 교부인 성 어거스틴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저서가 있는 참회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또 하나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쓴 동기는 이렇습니다. 로마가 410년 알라릭이 이끄는 게르만에 의해 침략을 당하였다. 그런데 로마사람들은 800년 만에 로마가 이방인들에 의해 침략을 당했기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마사람들은 이 원인을 찾던 중, 그 원인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로마의 신들을 빼앗아 기에 전쟁에서 졌다고 생각하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를 시작하자 어거스틴이 여기에 대하여 답을 내린 것이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이다. 413년에 집필을 시작해서 26년 까지 집필했는데 150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로마가 이방인에 의해 무너진 핵심적인 이유는 기독교 때문이 아니고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로마의 종교들이 도덕적 타락을 경고하지 않했기 때문이고 오히려 기독교는 교회로 피신해 온 사람들을 교회가 보호해 주었다고 하였다. 진리를 따르는 도덕적 성숙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진리를 따르지 않고 도덕적 타락을 쫓는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의 차이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의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도덕적 성숙을 추구하는 공동체이지만 지상의 도성의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자기를 지독하게도 사랑하며 세상에서 썩어 없어질 것에 집착하는 공동체로 결국 하나님의 도성은 진리 안에서 완성되지만 지상의 도성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는 우연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금방 없어질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도성의 삶을 살아가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 장사를 꼭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보석장사입니다. 보석은 부피가 작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들고 나가기가 쉽습니다. 또 하나는 채소장사입니다. 채소장사는 썩으면 버리고 가면 됩니다. 썩은 채소를 가져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은 영원한 본향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썩어 없어질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지상의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인 영원한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더 나은 본향이 있음을 증거하며 이 세상을 나그네로 순례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20201018일 새믿음교회 정영진목사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