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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6:9
gkffpffndi
2016. 9. 2. 15:07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6:9)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있어서 기도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고,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기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아닌 이교도들에게서도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을 숭배하여 나무나 돌이나 동물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기도합니다. 이슬람은 ‘알라’신에게 하루에 다섯 번 씩 메카를 향해서 기도합니다. 불교에서는 돌에다 금을 입힌 돌부처에게 절을 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어떤 종교는 고행이나 금식을 통해서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도 하루에 3번 씩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중에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신 것은 앞서 유대인인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잘못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지적하신 바리새인의 기도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바리새인의 기도는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였습니다. 외식하는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께 대한 의식이 없이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였습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이교도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주술’을 외우는 그런 기도입니다.
이것은 열왕기상18장에서 바알 선지자가 엘리야 선지자와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신이 참신이라고 하여 경쟁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불이 내려오지 않자 아침부터 낮까지 반복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응답이 없자 바알 선지자들은 자신의 몸을 칼로 자해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이교도들의 기도가 중언부언 기도입니다. 오늘날 어떤 종교에서는 자신의 종교의 특정문자를 반복해서 말하면 재앙과 질병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헛된 기도와는 다른 기도가 우리가 하나님아버지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통해서 바른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특별하신 하나님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대화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아버지와 특별한 관계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기도와는 다른 인격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주기도문의 첫 시작을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상당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주기도문의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를 앞에 두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가장 중심에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가 마음에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아버지가 먼저 나와야 합니다. 내가 먼저가 아니고 내 가정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아버지를 내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천국시민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에서 아버지가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것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감이 있어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가 나와는 상관없이 생각될 수 있지만 성경에서 ‘하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마임’과 헬라어 ‘우라노스’인데 샤마임이나 우라노스는 우리가 보는 물리적 하늘(sky)을 뜻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아버지가 계신 하늘(heaven)을 뜻하기도 합니다. 헬라어 ‘우라노스’가 여러 번 사용된 사도행전1장11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자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sky)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heaven)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하늘은 헬라어 ‘우라노스’인데 NIV성경에는 맨 처음에 나오는 하늘은(Sky)번역하였고 뒤에 나오는 하늘은 (heaven)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에베소서에는 이 하늘에 대해서 자세히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엡1:20에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2:6에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3:10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엡4:10절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6:9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난 이후에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역대하6:18절에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여기서 보면 ‘하늘’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셋째 하늘이 어디 입니까? 지존하신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입니다. 사57:15절에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하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대기권입니다. Sky입니다. 두 번 째 하늘은 우주입니다. 천체입니다. 우주는 지금도 무한팽창하고 있습니다. 빛의 속도로 수백억년을 가도 도달하지 못하는 광대한 곳입니다. 그야말로 무한대의 영역이요 과학자들은 우주를 신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셋째 하늘은 우주 너머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무신론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불랙홀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불랙 홀이 어떤 곳입니까? 모든 별을 빨아 드리는 곳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모든 행성을 빨아들이는데 그 속에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임사체험을 하는 사람들의 간증이나 책을 보면 죽음 뒤에 어둠 속으로 빨려가다가 빛의 세계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불랙 홀을 지나서 가다가 그 너머에 빛의 세계에 도달 한다고 봅니다. 성경 딤전6:15-16절에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 만이 빛이십니다. 그 분이 계신 곳은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의 세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고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을 넘어서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너머에 계신 상상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시고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으로 우주 바깥 어딘가 더 큰 공간에 계신 분으로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차원으로 신비하게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취향대로 길들일 수 있는 분이 아닌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께 깊은 신비와 경외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거나 하나님을 모욕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우리가 맨 처음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고 지존하신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 째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단어는 수평적 관계의 기초입니다. 우리엄마, 우리아빠, 우리가정, 우리교회 우리가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단어에는 ‘개인’아닌 공동체 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닌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말에는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에서 벗어난 공동체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보다는 나의 기도가 우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아버지가 아닌 우리 아버지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닌 가족의 공동체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공동체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그리스도의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 나와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다른 자녀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우리’라는 정체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요소가 담겨 있지만 우리라고 하는 말은 가족이나 형제, 그리고 지체의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정겹습니다. 평안하고 가깝게 느껴집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있을 때 함께 할 수 있고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통도 슬픔도 아픔도 함께 나누고 지고 갈 수 있기에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나의 기도를 넘어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기도를 넘어서 우리의 기도로 확산되어야 합니다.내 가정의 기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교회와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내 가정 내 교회만의 기도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하고 연대함으로 ‘우리’의 기도의 의미가 넓어져서 공동체적 기도로 확산되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7장,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 하실 때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하는 말을 무려 35번이나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야훼’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4:4-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요일3: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니라.” 바로 여기에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자녀요, 그 분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대단히 친밀하고 신뢰할 만한 분이십니다. 아버지가 집안에 계시면 든든합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자존심이며 기둥이십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필요를 다 들어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든든한 아버지와 같습니다. 믿을 만하고 신뢰할 만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거짓이 없으십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그 분께 나아가서 우리의 소망과 간구를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갈4:6절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연히 일치로 한국어로 부르는 아빠와 똑 같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아빠가 멀리 출장 갔다가 오시거나 오랜 만에 아버지를 만날 때 반갑게 뛰어가서 아버지 품에 안기면서 ‘아빠’하고 달려들지 않습니까? 이 호칭에는 아버지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감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화산처럼 솟구쳐 오르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새 번역 성경 롬8:38-39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 들도, 현재일도 장래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끓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아버지’라고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롬8:32에서 사도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 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아버지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분의 사랑에 잠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격미달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달려가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씩 경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절망 의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달려가서 ”아버지!“하고 부르며 그 품안으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아버지 품안에서 힘을 얻고 일어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온전한 아들, 딸들로 살아 하나님과 함께 영광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6년 9월 4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