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kffpffndi 2016. 8. 26. 11:22

기도에 대하여 마6:5-8

경건한 유대인들은 생활 속에서 3가지를 실천했다. 기도와 구제, 그리고 금식이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 기도를 규칙적으로 하였다. 오전9, 정오, 그리고 오후3시이다. 3:1-10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9시 기도시간에 맞춰서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이 사람이 구걸하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 손으로 잡아 일으키자 앉은뱅이가 곧 일어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힘은 어디서 왔겠습니까? 규칙적인 기도에 있었습니다. 9시는 우리나라 시각으로 오후 3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정기적인 기도시간을 갖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자연스런 행위로 생활 속에서 습관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 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식 속에는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번에 리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서 자신의 나라와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뛰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의 관심 있는 종목은 남자 100미터 육상경기입니다. 올해 올림픽3연패로 세계최초의 사람으로 자메이카의 우샤인 볼트에게 온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었는데 100미터 출발지점에 서자 볼트는 하늘을 향하여 손가락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200미터 뛸때도 똑같은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에 보니까 아프리카 출신들인 흑인 여성들이 목에다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뛰는 사람들이 눈에 뛰었습니다.

 

이번에 믿었던 유도나 레슬링에서 노메달에 그쳤지만 우리나라 양궁이 단체전에서 전 종목을 석권했다고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전에서 금달을 딴 장혜진 선수는 2010년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4년 전 런던 올림픽에서 4등을 해서 국가대표로 출전하지 못한 아쉬움을 이번 리오 올림픽에서 영광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시티에스와의 인터뷰에서 기독 신우회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청년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메달을 많이 따서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아버지께 돌렸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진실한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경건한 모습의 하나인 기도하는 것 까지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책망을 받게 된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 그리고 회당 앞과 계단에서 자신들이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도하였기에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이다. 한 마디로 진정성이 결여된 보여 주기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바리새인의 보여 주기 식 기도를 지적하셨습니다. 5절에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거룩한 종교행위인 기도조차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기도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일 수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에서는 공중기도나, 대중기도가 그런 것입니다. 공중기도를 하다보면 어느 덧 자신이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전에 있던 교회에서 보면 어느 장로님은 마태복음에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인용하면서 기도하니, 사람들이 그 장로님의 끝날 때가 되면 사람들이 중간에 다 나가고 자리가 비어 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기도가 눅18:9-14절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였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은 아주 당당하게 성전앞줄에 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 즉 사기꾼, 죄인,간음을 행하는 자와 같지 않고 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의 두 번 씩 금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반면 세리는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런데 이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올바른 기도였는가 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종교규율에 따라서 일주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였습니다. 금욕과 기도, 그리고 헌금에 있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주님께 의로운 기도라고 인정받지를 못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형식은 갖추었지만 내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하겠습니까.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은 자기 의로 가득 찬 기도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당연히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자기 의, 교만한 기도였습니다. 하지만 세리의 기도는 자신은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겸손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올바른 태도는 세리와 같은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집나간 탕자가 거지가 되어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께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15:18-19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아들이 아닌 품꾼으로 써 달라고 하면서 자신을 낮출 때 아버지의 마음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럴 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새 신을 신겨드리고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동네에서 크게 잔치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언제나 탕자와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와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18:1-8절에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수시로 가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간청하니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리라. 만약에 내가 들어 주지 않으면 나를 번거롭게 하리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기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슈코마이란 뜻은 한 방향으로 원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응답 받을 때 까지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응답이 더디 온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응답받겠다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들어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열왕기상18:41-46 엘리야의 기도가 간절함의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를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에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왕 아합과 그의 부인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다 죽이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셨는데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성경에는 기도의 자세가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기도는 간절함이 묻어 있습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겸손히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환에게 말합니다. 바다 쪽에 비구름이 보이지 않느냐, 그가 올라가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말합니다. 일곱 번 까지 다시 가라. 성경에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비가 올 때 까지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한 결과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 해 지더니 큰 비가 내려 가뭄에 타 들어가는 땅에 단비가 내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에 간절함이 있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형식적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앙에 간절함이 있다면 우리는 형식만을 갖춘 신앙행위에서 벗어나 마음이 담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간절함은 마치 동맥을 통해 피를 공급하여 맥박을 뛰게 만드는 심장과 같다. 간절함은 하나님을 모든 일의 중심으로 삼는다. 간절함은 단지 기도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한다. 그리고 간절한 기도는 전심으로 하는 기도이다. 전심으로 하는 기도에는 인간의 전체 존재, 즉 마음과 영혼과 육체가 함께 한다. 기도는 우리의 전 인격을 요구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들여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 즉 자신에게 속한 것과 자신에게 비롯한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에게 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온전한 기도의 비밀이자 능력 있는 기도이다. 지난날에 하나님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은 모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전부를 요구하신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사용할 수 없다. 주저하는 사람, 마음이 나뉘어져 세상과 자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

 

이러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만의 은밀한 골방, 기도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골방 기도는 비밀을 나누는 기도 입니다. 숨김없이 자기 죄 와 마음을 다 털어놓는 기도여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기도는 호흡이다.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신자가 아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와 한 몸이 된다.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중언부언이란 말은 목적이 없는 많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타종교인들이 주문을 외우는 거와 같은 기도 말 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주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아버지와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마음의 평안을 얻고 응답을 가져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기도하셨기 때문이며,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골방기도를 원하십니다. 은밀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비밀을 아뢰고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께 엘리야처럼 위대하게 쓰임 받고 응답받은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6828일 청주 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