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염소의 비유 발제
비유해석과 설교
발 제: 정 영 진
본 문: 마25:31-46
제 목: 양과 염소의 비유
1. 본 문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보았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개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 본문 구조
마태복음 저자는 종말 설교의 마지막 위치에 ‘양과 염소의 비유’, 즉 ‘최후의 심판의 비유’를 둔다. 이로써 예수의 종말 설교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 비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지루할 정도로 같은 말들이 반복된다. 마태복음에서 반복되는 것은 강조의 의미를 가진다. 이 비유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4-36 : 우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칭찬
37-39 : 우편에 있는 사람들의 놀라움의 질문
40 : 왕의 대답
41-43 :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
44 : 왼편에 있는 사람들의 놀라움의 질문
45 : 왕의 대답
46 : 결 론
3. 명칭과 진정성 문제
이 비유는 흔히 “최후 심판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혹은 “세상 종말의 비유“라고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비유“라고 말할 수 있는 가에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엄밀히 말해서 오직 31-33절 만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비사(比事; Similitude) 뿐이다. 다드도 이 본문이 양과 염소의 비유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고 이 본문은 인자를 심판자로 나타내면서 마지막 심판의 장면을 소개하는 ”간단한 묵시문학“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하게 헌터도 이 이야기를 부분적인 비사요, 부분적인 알레고리요, 부분적인 묵시문학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진정성에 관한 문제이다. 현재의 본문이 예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고 그런 주장을 위해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지적되었다. 우선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나타내는 것은 최초 전승 층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 전승에 의하면 예수는 심판자가 아니라, 마지막 심판 때의 증인이었다. (cf마10,32,막8,38,눅9,26,12,8)또한 예수가 자신을 왕으로 나타낸 것은 여기(34-40절)이외에 없기 때문에 본문이 예수께로부터 나왔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마귀란 용어(41절)는 사탄보다 훨씬 후대에 전승에 속하는 것이고 그래서 마가복음에선 나오지도 않고 있다. 또한 이 비유이야기는 예수가 말씀하신 것 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초대 교회 혹은 복음서 기자의 구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대되는 주장도 있다. 복음서 기자들의 어휘나 표현들이 나오고 있지만 내용은 예수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면, 히브리 전승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대칭구조가 이 이야기 가운데 드러나고 있고, 35절과 40절에 반복되고 있는 말씀, 곧,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 이니라”는 말씀은 막9,41, 눅10,16, 마10,40 등에서도 볼 수 있는 말씀으로 그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마태의 독특한 용어와 특성을 무시할 수 없기에 이 비유가 그대로 예수에게서 나온 것이라 생각할 수 없다 할지라도 본문 가운데 “인자(31절)가 ”임금(34절,40절,45)등에서도 볼 수 있는 말씀인 것을 고려한다면 이 비유가 마태의 구성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가 본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전승과정에서 특히 마태에 의해서 상당히 편집적 손질이 가해져서 현재의 본문 형태를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4. 비유의 본래 형태
이 비유가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다른 복음서에 또는 외경이나 다른 유대 문서에 똑같은 평행본문이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본래의 비유형태를 찾아낸다고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본문에서 마태의 편집적 손질과 그로 인한 후대의 첨가 본문이나 수정 등을 찾아내고 제거함으로 어느 정도 마태 이전의 본문 혹은 예수 비유 형태에 가까이 이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비유형태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찾아보고 그 비유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전체적으로 볼 때 현재의 비유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마태의 서론 구절(31절):내용적으로는 마태의 다른 두 본문(16:27,19:28)과 유사하며, 이 구절이 여기 서론으로 첨가된 것은 마태가 이 비유를 현재의 문맥 즉 인자의 도래를 다루는 문맥에 편집해 넣기 위해서이다.
2)목자의 비유(32-33):오직 이 두 구절에서만 비유적 요소가 나오고 있으며 33절의 “...하는 것 같이”), 비교적 마태 자신의 편집적 흔적이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3)연결 문구들(34,41,46절):이 구절들은 나중에 목자의 비유 (32-33)를 35-40절, 42-45절과 연결시키면서 이야기를 심판의 장면으로 극화시키기 위해 첨가된 구절들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에 사용된 용어들은 편집적 특징들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4)오른편(35-40절) 및 왼편(42-45)에 있는 자들과 임금과의 대화:여기에서도 편집적 특징들이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나 행치 않은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행하거나 행치 않은 것이라는 말씀으로 오른편과 왼편에 있는 자를 알레고리적으로 양과 염소에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현재의 비유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불 때 마태의 독특한 어휘나 편집적 손질이 강하게 나타나는 첫 번 째와 세 번 째 부분을 삭제할 경우 두 번째와 네 번 째 부분이 남게 되는데 이 두 부분의 결합된 형태가 본래의 비유 형태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5. 본문에 대한 주석
31절-이 강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인자의 오심이 중심적인 단계를 이룬다. 다시금 예수의 재림과 종말의 시기와 관련된 제자들의 최초의 질문이 생각나게 만든다. 여기서 실제적인 주제는 시기가 아니라 인자의 오심 그리고 결과적으로 준비되어야 할 것들이다.이 사건은 이어지는 대 심판 장면을 표시해 주는데 거기서 인자되신 예수님께서는 재판관- 구약성경에는 야훼에게만 제한된 역할이다-으로 활약하신다.
32-33: 모든 민족이 그 앞에 모인다. 포괄적인 이 언급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는 사명과 일치한다. 여기서 모두 모였다고 하는 것은 복음서 초기에 언급된 의인들(참조3:12: 13:30) 또는 의로운 자들과 사악한 자들의 모임 둘 다(참조13:47:22:10)와 동일한 “모임”을 말한다. 그레이(S.W. Gray)는 이 구절의 의미와 관련한 결론을 (1)모든 인간 (2)모든 그리스도인 (3)모든 비그리스도인과 비유대인 (4) 모든 비그리스도인 (5)모든 비유대인을 말한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에는 이스라엘과 온 민족이 그 대상이 된다. 심판의 대상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 비유 이야기에서 화자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둔다. 또한 양은 일반적으로 흰색으로 되어 있고, 염소는 검은 색이다. 또한 양은 순종적이지만, 염소는 고집 센 동물로 그려진다. 그래서 양은 의인들을 상징하는 비유로 자주 사용되었다. 구약의 전통에서 보면 오른편은 늘 왼편보다 더 나은 곳이다.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임재하시는 곳이다. 목자가 양을 오른편에 둔 것은 구원하기 위함이고 염소를 왼편에 둔 것은 심판하기 위함이다.
34- 하나님의 축복은 상속으로 이어진다. 인자가 다스릴 영원한 나라는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이다. 이 나라를 “상속하라”라는 말은 그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35-36: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선행의 목록표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오른편에 있던 양들은 이러한 선행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선행의 대상이 바로 인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인자에게 이렇게 행한 결과 이들은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구원은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심판의 기준은 외적인 행동이었으나 마태의 신학으로 볼 때 그 외적인 행동은 그의 믿음에서 나오는 열매다. 나무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얻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외적인 행동이 기준으로 제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그들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어 주는 내적 상태다.
37-39:“의인”(호이 디카이오이) 은 예수께서 방금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에 놀라워한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취득하고 자신들이 이런 식으로 예수께 공양했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였다. 반면, 마태에게 있어서 사람은 믿음을 통하여 변화되어 의로운 행실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된다.
40- 의인들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헤니 투톤 톤 아델폰 무 톤 엘라키스톤) 이 일을 한 것이 사실 상 예수를 위해 그 일을 한 것이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을 그의 제자들과 지극히 동일시하셨다.(참조. 고전 8:12:12:27: 행9:5) 즉 “내 형제” (톤 아델폰 무) 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게 그 말이 일반적인 인간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형제나 자매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다. 복음서의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예수께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른 자들은 제자들이다. “작은”(엘라키스토스)이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서는 오직 5:19에서 사용되었을지라도 “작은 자들 중에 하나” “작은 자”.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제자들을 언급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18:6,10,14) 거기서 주제는 역시 같은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하지만 예수의 원래 의도는 모든 사람,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을 것이다.(Jeremiss,E.Schweizer). 하지만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주인과 제자의 동일시에 관한 언급으로 마태복음 안에서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대한 관심과 친절을 문제 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형제”라는 용어는 크리스챤들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특별히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41-“왼편에”는 33절에서 염소에게 사용된 구절에 나온다. “나를 떠나라”는 명령은 7:23절의 심판을 생각나게 한다. “저주받은 자들”은 신약성경에서 오직 여기서만 불의한 자들에게 사용되었다. 불의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영원한 고통의 장소 즉 “마귀와 그 자식들을 위하여” 예비된 불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지옥을 영원한 불못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원래 마귀와 그 부하들을 위해서 예비 된 곳인데, 불신자들도 이곳으로 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불못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예비 된 곳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 나라에 인도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도 불못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지음으로써 마귀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그곳을 택하게 된 것이다.
42-43 왼편에 있던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를 임금은 자세히 설명한다. 그들은 오른편에 있던 사람들이 했던 그 일을 하지 않은 자들이다. 즉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우크 에페스켚사스테)로 되어 있다. 의인들이 자비의 행동으로 계속해서 인정받은 것과는 달리 불의한 자들은 예수께 대한 자비의 행동의 결여로 책망을 듣는다. 구체적으로 악을 행한 것도 잘못이지만, 선행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다. 이들은 바로 행하지 않은 죄를 범한 것이다.
44-자신들은 인자를 만난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인자는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신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눈이 어두워 그를 통해 오시는 인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45-“ 이 지극히 작은 자”로 묘사되는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곧 예수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지극히 작은 자”라는 인물은 동료 제자들, 소위 “작은 자들”이다. 이들의 잘못은 ‘하지 않은 잘못’(sin of not-doing)이다. 이것은 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엎어 놓는다. 구체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다. 선행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지 않은 것도 죄다.
46- 최후의 결론으로 악인은 “영벌”(콜라신아이오니온) 의인은 “영생”(조엔 아이오니온)에 처해질 것이다. 심판은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심판은 영원한 삶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심판을 통과한 사람은 영생이요,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영벌이다. 중간이란 없다.
6. 본문에 대한 해석
의인과 악인이 마침내 구별되는 대 심판의 시기는 인자의 영광스러운 도래와 함께 다다를 것이다. 온 세상의 민족들-정확히 말하면 모든 민족의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비유는 마지막 심판 때에 어떤 기준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인가에 대해 독특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심판자가 축복을 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를 구별할 때 그 기준은 결코 “믿음”이 아니라, 행함 곧 “사랑의 행위”라는 점이다. 곧 궁한 자에게 사랑의 행위를 베풀어 줌으로써 예수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자가 “의인”(46절)이고 영생에 들어가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결국 마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말미암은 의”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특별히 이 성경 구절 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는 “행위”에 의존하여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의존하여 설 수 있고 또 믿음만을 통해서 사람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바울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듯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2:13) 라고 말한다. 성서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우리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의 종류는 결코 단독으로 있지 않다. 구원하는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이다. 행위들 배후에 참 믿음이 있다는 것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명백하다. 그 한 가지 이유는 “형제들에게 베푼 사랑의 행위와 묘사된 이런 종류의 사랑은 형제들을 크리스챤 또는 크리스챤 선교사들로 잘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크리스챤 크리스챤 선교사에 대한 호응은 동시에 크리스챤 메시지에 대한 호응이다. 마가복음9장41절은 이 견해를 뒷받침 해준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둘째 이유로 예수의 가르침 또는 비유에는 중립지대가 없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게 된다. 사람은 그리스도 편이 아니면 그의 반대자 중 어느 하나이다. 만일 그것이 참다운 믿음이라면 그것이 낳은 사랑에 의하여 알아 볼 수 있다. 이 비유의 중요한 요점은 최후의 결정적 심판의 주제를 중심한 것이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율법적으로 이해했던 것과 같이, 심판의 기초는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자비의 행위를 베풀었는가 또는 안 베풀었는가이다 (마24:40) 그러면 이 형제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민족들“과 ”양들“은 누구인가? 예수에게 있어서 모든 민족들(유대인과 이방인)의 최후의 심판은 그들이 예수의 사자들(the messengers), 즉 예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형제들“에게 보여준 호응에 기초할 수 있다. 이러한 호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의 면에서 보다는 예수의 사자들에게 보여준 사랑의 행위를 낳을 수 있고 삶을 변화시키는 믿음(life-changeing belief)을 그들이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마태에게 있어서 이 비유는 크리스챤 선교사들(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마지막 날에 민족들이 받을 심판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있어서 꼭 같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예수의 메시지를 어떻게 할 것이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이 사자들을 대접하는 것에 의하여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죄를 용서하시는 그의 은혜를 거부하는 염소들은 화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양들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마지막 심판 때에 다루어질 죄는 우리가 범한 악행죄 혹은 범법죄가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이나 무관심 속에서 그냥 지나쳐 버리고 행하지 않은 태만죄 혹은 무관심 죄라는 점이다. 이 비유에서 “저주받을 자들”이라고 하여 “영벌에 처하게 된 자들의 목록에는 그들이 행한 악행은 하나도 언급된 바 없고 오직 그들이 행하지 않은 일들만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결정적인 죄는 해야 할 일을 ”아니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복받을 자들“로 인정되어 ”영생“에 들어가게 된 자들은 모두 악행이나 범법 죄를 저지르
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불쌍한 자들에게 사랑의 행위를 한 것 때문에 ”의인“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마태에 의하면 장차 심판 받을 때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다. 저주를 받게 된 원인은 큰 악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행하여야 할 사랑의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태의 관점은 우리의 구원여부가 우리의 행함 여부에 달려 있지 우리의 믿음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이 비유에서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사용되고 있지 않다. 바로 이 점에서 마태의 사상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무엇으로 어떻게 구원을 얻는 받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다. 바울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으로만 (sola gratia) 구원받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가 행함으로이지 믿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약2:24)고 말한 것처럼 마태도 ”행함으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며 “행하지 않은 죄”를 범한 자들은 어두운 데 쫓겨나 슬피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말한다.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16:19-31)는 이 원리의 또 다른 하나의 좋은 본보기이다. 부자는 나사로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았다. 그의 죄는 적극적으로 나사로에게 선을 베풀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의 행위를 실천할 것을 내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이 이웃을 돕는 삶을 지향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의 전체적인 삶이 이웃 지향적인가, 아니면 자기중심적인가 의해서 결정된다.
마지막으로, 마태는 이 비유를 통해 사랑의 행동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은밀히”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비유에서 사랑의 행위는 본인들도 모르는 가운데 행해졌음이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37-44절에서 각각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란 문구가 평행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종교적인 행위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해서는 안 되고 오직 “은밀히” 행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랑의 행위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행해져야 복 받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은밀히”행하더라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아시듯이, “내가 언제”라고 나 자신도 모르더라도 “지극히 작은 자 가운데 하나” 속에 숨어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다 아시고 영복을 받을 자와 영벌을 받을 자를 구별하신다. 사랑의 행동도 물론 소중하지만 더욱 귀한 것은 그 행동이 은밀한 중에 행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그의 공동체에 주는 교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32-33절의 “심판”개념과 35-40절과 42-45절에 나오는 사랑의 행동에 관한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마지막 때의 심판에 관한 교훈과 사랑에 관한 교훈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본래의 비유를 통해 마지막 때에 심판이 있을 것이고 그 때에 중요시 되는 것은 예수의 사랑의 계명(“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천했는가 하는 점임을 강조하려고 했다고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굶주린 자를 먹이는 일,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는 일, 나그네를 영접하는 일, 헐벗은 자를 입히는 일, 병든 자를 돌보는 일, 그리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는 일이다. 마시게 하는 일, 나그네를 영접하는 일, 헐벗은 자를 입히는일, 병든 자를 돌보는 일, 그리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는 일이다.
참고문헌
김득중, 『복음서의 비유들』 서울:컬콜디아사,1988.
로버트 스타인, 이희숙 역 『예수의 비유연구』 서울:컨콜디아사,1988.
김영봉, 『마태복음Ⅱ』 서울: 대한기독교서회,2004.
도널드 헤그너,『마태복음 하』 채천석 역. 서울: 솔로몬,1999.
2014년 5월 7일